▲ 생의 말년, 흡연의 끔찍함을 호소하며 안타까운 일기를 마감한 코메디언 이주일 씨의 수많은 '말의 기록'들 중에서 내게 단연코 익숙한 한마디는 이것이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그의 수많은 몸짓의 즐거움 중에서 제일 인상깊은 장면은 역시 '수지큐' 노래에 맞춰 경쾌하게 춤추던 그의 모습이다. 겉절이로 말하자면 콩나물은 확실히 팍팍~ 무쳐야 한다. 아이보리색감 고운 줄거리마다 고추가루, 참기름, 간장... 조근조근 배어들어 한 입 베어물면 아삭아삭, 소각소각... 즙액을 밀어내며 구수했던 콩나물무침, 모름지기 팍팍 무쳐낸 거침없는 솜씨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그 맛, 근질근질 좋았던 수지큐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콩나물은 도처에서 대한민국의 식탁에 오른다. 찜의 세계에서 도대체 콩나물이 없었다면 찜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찜의 나라에서 콩나물은 그 높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도 남는다. 아구찜, 명태찜, 꽃게찜, 해물찜... 하나같이 콩나물의 은덕으로 자리를 지키는 작품들이다. "다들 내 덕인 줄 알아, 이것들아~!" 라고 큰소리 쳐도 별로 할 말이 없는 찜들의 속내, 그 도토리 키재기다.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콩나물밥을 자주 해 주셨었다. 콩나물밥은 콩나물 반, 보리밥 반이었다. 대가리는 은근히 싫어했지만 콩나물을 꽤 좋아한 편이어서 참기름 고소한 향 스치면 꼬르륵 소리나도록 사무쳐오는 그 콩나물밥을 갖은 양념 간장에 비벼 맛있게도 잘 먹었었다. 

기억 안난다. 나는. 별로 있지도 않았지만, 바글바글 차려낸 한정식 휘어진 상다리, 무수히 켜켜하던 음식들의 폭주를... 그렇지만, 또 기억난다. 아니, 기억 뿐만이 아니라, 너무 선명해서 어제 먹은 밤참 같은 느낌이랄까. 할머니, 할아버지따라 봄밭에 나가 그늘 아래서 먹던 식은 꽁당보리밥의 구수했던 느낌을. 비 오는 일요일, 툇마루 문도 다 열어놓고 비벼먹던 고슬고슬 찰지던 콩나물밥의 간간함을. 콩나물밥은 살짝 짭쪼롬해야 맛있다. 허리 끊어질 듯 '조자 앉아' 매던 콩밭 고랑 저만치 두고 넓직한 그늘 아래 둘러 앉으면 데친 호박잎 사이로 햇살 푸르게 찍혀오곤 했었다. 후둑거리던 처마 끝 빗소리처럼 아득했던 콩나물밥, 아직도 물방울같은 소름, 기억 속에 돋는 이유다.         

콩나물은 八味였을 때도, 十味였을 때도 여전히 베스트를 지킨 전주의 '맛'이다. 겨우 몇 군데 다녀본 초보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먹어본 전주가 주는 콩나물은 탁월했다. 펄펄 끓는 콩나물국밥 속에서도, 토렴의 기나긴 터널 지나온 또 다른 콩나물국밥 속에서도 전주 콩나물은 탄탄한 저력, 감히 넘보지 못할 탁월함이라 할까. 그야말로 '八味', 그 찬사에 필적할 품격 서려 있었으니. 전주를 오늘의 명성에 이르게 한 또 하나의 작품인 '全州음식'이, 그 속내 속속들이 다 '초지일관'인지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다른 지방에 비해 격을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배우고 또 배워야 할 점이다.

조선의 한 때에는 사실 비빔밥하면 '전주'가 아니라 '진주'였다 한다. 오늘날 전주하면 알토란 같은 비빔밥집들이 꽤 많다. 서울까지 올라와 너끈히 한 자리 잡고 있는 비빔밥집들도 역시 전주의 것이다. 아무리 오방색이라 해도 내 경우, 너무 칼라풀하면 오히려 식상해지는데도 전주비빔밥은 함부로 '그렇다'라고 할 수 없는 저력 숨어 있다. 그 저력의 더 깊은 지위에 진주 비빔밥이 있었다 한다. '노력'이란 것이 비단 우리 집 육학년 꼬마녀석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언으로 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루던 막강한 지명도, 진주냉면도 이제는 오랜 동면을 깨고 나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문패로 보자면 조금 애매한 이름(할매 콩나물무침 손칼국수이기도 하고, 할매손칼국수이기도 하고, 속리산 손칼국수이기도 하다) '속리산 손칼국수'(043-543-2920)집은 법주사 앞에만 가면 은근히 마음 가는 집이다. 산채의 나라 속리산답게 산채정식집들 진을 치는 곳 다름아닌 법주사 앞 시설지구이긴 하지만, 두어 차례 적막강산 뜨내기의 홀대를 경험하게 되면 만정 다 떨어지는 곳도 또한 다름아닌 산채정식집이다. 그럴 때면 가벼운 주머니도 지킬 겸 마음도 가볍게 할 겸 찾게되는 집들이 있게 마련이다. 애시당초 그렇게 찾아간 식당은 아니었지만, 법주사 찾을 때마다 뜬금없이 그리워지고 말았다. 구수한 콩나물무침 때문에. 생각만으로도 입맛 싹 돈다.  

처음, 이 지역에 사시는 토박이 분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찾아왔을 때만 해도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는 산나물 때문에 "나는 콩나물이 싫어요!" 라고 말해 버릴까 무던히도 고민했었다. 두서없이 망설이는 사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콩나물 한 종지, 아니 한 접시 떡하니 차려졌었다. 이를테면 칼국수의 전주곡었는데(가히 카르멘의 전주곡에 필적할...) 한 입 먹어보니 비로소 왜 문패에까지 그 이름자 새겨 넣었는지 알고도 남을 것만 같았었다. 전주 콩나물이 시원한 맛이 일품이라면 속리산 콩나물은 고소한 풍미가 참으로 일품이었다. 은근한 양념의 조화로움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이라고 할까.      

사실, 콩나물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근자에도 여전히 콩나물음식은 서민의 밥으로 상징된다. 없는 자들의 만찬에 빠짐없이 콩나물무침이 있었으니, 친숙은 어떻게든 다 연유 잇닿아 있음인 것이다. 싫어도 먹어야 했던 우리집 콩나물국에서 언제부터인가 아스파라긴산이라는 특별히 유익한 무엇인가가 발견되었다하여 급기야는 소주광고에도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풍운아 콩나물이다. 당대의 美女가 아니면 꿈도 못꾼다는 소주 광고에, 그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이니 격세지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 아스파라긴산은 '창과 방패'다. 열심히 찌르고 또 열심히 막고... 부끄러움 심각해 익는 동안 슬쩍이라도 열어보면 온통 비린내 뿜어내는 콩나물, 까칠한 한 성깔도 숨겨 놓았다. 나, 녹록치 않은 것 알지?      

▲ 班家 칼국수로는 세계 최고 경지라 할(의미로나 차림으로나) 안동의 안동국시(안동을 떠난 안동국시 아닌, 안동 속에 살아있는 안동국시)에 비하면 단촐한 차림이다. 4,000원의 칼국수와 5,000원의 감자부침 오른 밥상. 그렇지만 나무랄 데 없는 격이다. 훌륭한 겉절이 김치가 있고, 뜨끈뜨끈한 칼국수가 있는가 하면, 구수한 '사이 음식' 부침개가 있다. 그저 빈객의 허기를 면하기로 이만한 그득함이 있을까 싶게 조화로운 밥상 그림 보여준다. 아이 녀석은 슬쩍 밀가루 냄새가 난나 하며 아는 체를 했지만, 못들은 체 했다. 이 집 스타일인 것을. 오히려 내겐 조금 적다 싶은 국물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랄까.

그 흔한 풋고추, 양념막된장이 없는 대신에 콩나물무침 커다란 접시에 올랐다. 많다, 생각되지만 많지 않다. 인심 나쁘지 않은 이 집 주인장님께서 그것도 모자란다 하면 더 담아 주신다. 흔쾌히... 무엇보다도, 이 그림은 막걸리를 위한 전주곡인 것이다. 감자부침도 그러한데다 구수한 콩나물무침까지 곁들였으니 막걸리 한 잔 간절함이야 뭐 '일러 무삼하리오!' 그렇지만 이 날의 내 몸은 거의 실신지경, 살아있음 만이 겨우 위안이었으니 막걸리는 저 막막한 장막 건너 아라비안나이트의 피리소리와도 다름 없었던 탓, 초인적 의지로 쏟아지는 유혹의 화살을 피해 갔던 것이다. 마치 '300'의 그날, 그늘을 이루었던 화살구름처럼 굳세게...           

▲ 겉절이는 대구 칼국수를 대구답게 하는 절품 반찬 중 하나다. 폭 익은 막김치, 음전한 포기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열에 아홉, 칼국수 제국 대구의 칼국수 반찬은 '낱배추겉절이'다. 막 버무려 낸 듯 싶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품 아니다. 능란한 젓가락질 솜씨를 가졌다면 저 넓직한 낱배추 펼쳐 놓고 그야말로 젓가락 신공으로 몇 조각으로 찢어낸 다음 척척 국수 가락에 얹어서 먹을 것이다. 때로는 그 찢기의 기술, 신통방통한 경우도 만난다. 그렇지만 정말 소담하기로는 손가락(잘 씻어야 한다)으로 쭉쭉 찢어 걸쳐 먹는 것이다. 이 집, 콩나물칼국수 배추걸절이는 갖출 것을 다 갖춘 秀作이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속살처럼 포근한 육질에다 칼칼하면서도 짭쪼롬한 양념이 잘 어울려 호감도가 쑥 올라간다.

칼국수는 대구의 누른국수와 흡사하다. 멸치(들어가는 재료 비단 멸치뿐만은 아니겠지만)를 바탕으로 삼는 국물내기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다르다면 칼국수 곁들임이다. 대구식은 밀가루에 적당량의 콩가루를 섞는다.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푸룻푸릇한 배추잎을 뚝뚝 끊어 넣는다. 늘씬하게 자란, 그러면서도 쉬도록 억세지 않은 정도, 청방배추 혹은 조선배추를 넣는다. 투박하지만 구수한 뒷맛을 안겨준다. 이렇게 바라보니 이 작품, 대구 누른국수와 난형난제다.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칼국수에는 만국 공통어처럼 애호박 나물이 들어간다. 삼, 사십년 전 대구의 육개장을 전국적 명성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다끼파'라는 불세출의 대파였다. 오늘날 대구의 칼국수는 조선배추 푸른 이파리가 저변 이끈다 해도 과언 아니다. 많은 장점들 더 있기는 하겠지만.      

돼지국밥에 애정을 쏟뜨리다보니 이제는 살짝 돼지 누린내 스치는 정도까지 허용치가 넓어졌다. 취향의 도약이다. 칼국수집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밀가루내 은근한 칼국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엄연히 존재한다. 내 입맛은 그렇게 민감한 정도는 아니니, 무엇이 되었건 맛있으면 괜찮다. 차림의 완성도가 문제일 뿐. 금방 치대고 밀어낸 티 역력하게 국수발이 힘차다. 양념도 너무 짜지 않게 배합했다. 국물은 아쉽게도 조금 적었다. - 주문을 외워서서라도 늘렸으면, 했다. 해장의 간절함을, 그러면서도 말못하는 심정을 주인장님은 알까? - 짬뽕이 그렇듯이 칼국수도 지켜야 할 국물의 능선이 있다고. 매끄럽지 않은 국수발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매끄러우려면 우동으로 갈 일이다.

▲ 감자부침개. 살큼살큼 씹히는 말랑한 감자 반죽 아니다. 대구 냉천 강원도집에서 맛보는 반투명 감자전 아니다. 그저 뚝뚝한 타입, 구수한 감자의 훈향 느껴진다. 밑간 충분하므로 간장은 살짯 스치는 것이 좋다. 감자전은 때때로 여운을 코로 흡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자는 부드러운 질감으로도 풍미를 전해주지만 훈훈한 냄새로도 미각을 돋구는 채소다. 대구에서 맛 본 감자전은 불로동에 있는 부여식당, 냉천에 있는 강원도집이 기억에 남는다. 

▲ 휴일, 손님들이 꽤 많다. 집단시설지구로부터도 한껏 벗어나 있는 곳이지만 찾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토속의 향기 물씬하다.

▲ 알고보니 이곳에 칼국수집들이 더 있다. 그렇지만 '콩나물'이라고 적힌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